
[필자: 제나 정(Dr.Zena Chung), 글로벌외교관포럼 & 한-인도 비즈니스문화진흥원 (IKBCC: Indo-Korea Business Culture Center) 이사장]
“라떼는 말야.”. 요즘 MZ세대가 이 말을 꺼낼 때, 그것은 우리가 즐겨 마시는 프렌치 라떼 커피 이야기가 아니다. ‘나 때는 말이야’를 줄인 이 표현에는, 과거의 경험과 연륜이 더이상 자동으로 권위와 정당성을 획득하지 못하는 시대적 인식이 담겨 있다. 경험은 물론 존중받아야 하지만, 경험 그 자체가 정의가 될 수는 없다는, 젊은 세대의 조용하지만 단호한 선언이다.
영어 동화의 첫 문장인 Once upon a time이 한국어로 번역될 때 흔히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라는 표현으로 쓰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물론 그 말은 실제로 호랑이가 담배를 피웠다는 뜻이 아니다. 다소 과장된 은유를 통해 “아주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지금의 현실을 비추는 상징적 시간”임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법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법은 늘 과거의 언어로 쓰이지만, 그 해석과 집행은 반드시 현재의 약자를 향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법은 정의를 구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기억력 좋고 자원이 풍부한 권력자에게만 유리한 장치로 전락되고 만다.
흥부와 놀부, 그리고 오늘의 법정에 선 두 형제
우리는 모두 어린 시절부터 ‘흥부와 놀부’라는 동화를 들어왔다. 마음씨 착한 동생 흥부는 다리를 다쳐 날지 못하는 제비를 발견하고, 계산이나 보상을 기대하지 않은 채 정성껏 돌보아 준다. 그 선의는 결국 박씨 하나로 돌아오고, 그 박에서 나온 복은 흥부와 공동체를 살리는 결과로 이어진다.
반면 형 놀부는 결과만을 모방한다. 그는 과정의 윤리와 마음의 방향은 무시한 채, 오직 ‘어떻게 하면 나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에만 집착한다. 그가 일부러 멀쩡한 제비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장면은,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하는 인간 욕망의 가장 적나라한 모습이다. 동화의 결말은 분명하다. 선의에서 비롯된 행위는 복으로 돌아오고, 탐욕에서 출발한 행위는 파국을 맞는다.
그러나 중요한 질문은 여기서 시작된다. 이 이야기가 오늘날 대한민국의 법정으로 옮겨진다면, 과연 판결은 여전히 정의로울 것인가. 오늘날 한국 법정에서 벌어지는 또 하나의 ‘동화’ 오늘의 현실을 대입해 보자.
흥부는 자신의 정직함과 상식, 그리고 정의가 살아 있다는 최소한의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는 진실을 말하면 진실이 보호받을 것이라 믿었고, 그래서 수천 혹은 수억 원의 수임료를 요구하는 대형 로펌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았다. 법치주의 국가에서라면, 옳고 그름은 자본의 크기가 아니라 사실과 양심에 의해 판단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놀부는 반면 법을 믿지 않는다. 그가 믿는 것은 법 그 자체가 아니라 ‘법률 서비스 시장’이다. 그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랜드마크의 최고급 펜트하우스에 살면서도 만족하지 못하는 인물처럼, 더 큰 안전과 더 확실한 승리를 위해 대형 로펌의 유능한 변호사들을 여러 명 동시에 고용할 수도 있고 또 고용한다.
재판의 흐름은 이때부터 달라진다. 흥부의 선의는 ‘관리 소홀’로 재구성되고, 흥부의 설명은 ‘부정확한 정보 제공’ 혹은 “사실 왜곡”이라는 법률적 의미로 바뀌며, 놀부의 탐욕은 ‘정당한 권리 행사’라는 언어로 포장된다.
결국 법원은 이렇게 말한다. “흥부의 잘못된 설명으로 인해 놀부에게 심각한 재산상 손해가 발생했다.”
그 순간, 우리는 참혹하고 냉혹한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정의는 패소하고, 자본은 승소한다”.
한국 법치주의가 외면해 온 불편한 진실 : 오늘날 한국의 법률 현실을 요약하면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 누가 옳은가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더 비싼 변호사를 고용할 수 있는가의 문제.
물론 국선변호사 제도가 존재한다. 그러나 많은 서민들은 체감적으로 알고 있다. 국선변호사가 자신의 인생을 걸고 싸워주는 ‘최후의 방패’가 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그 이유는 개인의 윤리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국선변호사에게 요구되는 것은 치열한 승소가 아니라, 절차의 완결과 사건의 처리다. 의뢰인의 삶과 고통은 통계와 실적표 속 숫자로 환원되고, 재판은 정의의 장이 아니라 행정 처리의 한 과정이 될 뿐이다.
이 지점에서 법치주의는 본래의 의미를 상실한다. 법은 약자를 보호하는 최후의 보루가 더 이상 아니고 부와 권력을 정교하게 방어하는 기술로 변질된다.
검찰개혁, 권한 (Authority)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 (Redirection)의 문제다.
지금 대한민국은 검찰개혁이라는 중대한 변곡점에 서 있다.
기소권을 어디에 두느냐, 수사권을 어떻게 나누느냐는 분명 중요한 제도적 쟁점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근본적인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검찰개혁은 단순한 권한 재배치인가, 아니면 법치의 방향 전환(redirection)인가.
이재명 대통령이 이끄는 국민주권정부가 마주한 시대적 과제는 분명하다.
진정한 검찰개혁은 조직 간 힘의 이동 (Transfer of Power/Authority)이 아니라, 법이 향하고 있는 방향을 바로 잡는 일(Redirection) 이다.
법은 더 이상 강자를 보호하는 방패가 되어서는 안 된다. 법은 약자가 마지막으로 기대어 설 수 있는 언어가 되어야 한다. 그럴 때에만 오늘날 법치주의 국가에서 입법·행정·사법이라는 삼권분립은 비로소 살아 있는 헌법 질서로 기능할 수 있다.
아 다르고 어 다른 한국어, 그리고 법의 언어 권력 : 한국어는 세계적으로도 드물게 미세한 뉘앙스를 담아내는 아주 훌륭한 언어다.
‘아’와 ‘어’ 하나로 의미와 책임, 법적 귀속이 달라진다.
이 언어적 풍부함은 축복이지만, 수사와 재판의 현장에서는 오히려 약자에게 충분히 불리하게 작동할 수 있다. 조사 과정에서 작성되는 조서의 한 문장, 한 단어는 법률 전문가의 손에 들어가는 순간 전혀 다른 의미 체계로 재구성된다.
결국 법치주의의 핵심은 조문이 아니라 질문으로 귀결된다.
누가 법의 언어를 해석할 권한을 독점하고 있는가.
그리고 진정한 법치주의란 무엇인가
진정한 법치주의란 선언이 아니다.
“법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는 문구는 출발점일 뿐이다. 진정한 법치주의란, 법 앞에서 약자가 먼저 보호받는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흥부가 다시 감옥에 가지 않는 나라, 그리고 놀부가 돈으로 정의를 매입할 수 없는 나라.
그것이 국민주권정부가 완성해야 할 대한민국 법치의 ‘모던 타임’이다.
Once upon a time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바로 MZ세대와 그리고 우리의 미래세대를 위해서 반드시 시작해야만 하는 우리의 냉혹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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